野史: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01.13 11:23
6기 선운그룹의 하루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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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83년 여름방학의 마지막 무렵이었다. 당시 나의 캠퍼스는 율전이었지만 집이 동숭동인터라 자주 명륜
동 동기 및 선·후배들과 만났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날도 아침 일찍(약 10시경으로 기억남) 병선과 명륜동 청
룡상 주변의 벤치에 앉아 쓰디쓴 담배(그 당시는 청자를 주로 피웠는데 이는 선배들의 강요.... ?)를 하나씩 입
에 물고 있었다.
그 당시는 우리는 학생신분이라는 것 외에는 뭐하나 풍족할 것 없는 빈털터리 신세 였고 그나마 학교에서 학
생임을 확인시켜주는 학생증 마져 술집(나는 율전의 초가집 병선은 명륜동의 시골집인 것으로 기억남)잡혀놓
은 상태였다. 요즘은 학생들이 과외를 해서 용돈을 충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에는 "과외 금지조치"가 내려
진 상황이라 학생들의 자금 원은 거의 집에서 보내주는 생활비(일주일만 지나면 다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읽
는 이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람)와 각종 아르바이트로 몇 푼 안되는 용돈을 만져보는 것이 전부였다.
벤치에 앉아있던 우리는 누가 먼저이야기를 꺼냈는지 아르바이트를 해보자는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내친김에
회사이름도 지어보자는 말에 용운의 끝자인 운과 병선의 끝자인 선을 따서 "선운" 또는 "운선"이 좋다는 말싸
움 끝에 결국에는 어감이 좋은 선운으로 회사명을 정하고, 선운그릅의 상품은 보리차와 고무장갑 그리고 수
세미-보리차 1봉지에 1000원 팔면 400원은 우리 것으로 떨어짐- 등으로 정했다. 그리곤 우리의 첫 공략지역을
신촌으로 정하고 버스를 타고 신촌시장을 향하여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신촌시장 입구 근처에 있는 허름한 건물 삼층에 올라가니 사무실 안에는 온통 보리차와 수세미 그리고 고무장
갑 등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고 그 뒤에서 사장인 듯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웃음을 던지며 다가와 말을 건넸
다.
아르바이트 해보려고 ? 예 !
얼마나 가져갈거니 ?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학생증이나 신분증은 있니 ? 아니요 !
그러면 주민등록증 이라도 ....... 여기 있어요....
어찌되었건 우리는 보리차 푸대를 주인으로부터 인계 받고 길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신촌시장의 장터 아
줌마 , 아저씨들에게 보리차하나만 사주세요 보리차가 싫으면 고무장갑도 있어요..... 라고 말을 건네며 가급적
웃는 얼굴로 다가갔다. 장터에 있는 사람들은 학생들이 용돈이라도 벌고자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인지 아
니면 우리가 측은해 보여서인지 5번 시도에 한 번 정도는 물건을 팔 수 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병선과
나는 기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좀더 열심히 팔면 우리 술집 외상값 다 값고도 남아.... 선운그릅 파이팅 !
열심히 물건을 팔았던 관계로 우리는 주머니엔 만원권 지폐를 넣고 다닐 수 있는 쾌거를 이루고 있었다. 이
때 용운아 ! 저 건물에 들어가 보자 내가 들어가 사람들이 많은가 확인하고 나올게 하면서 들어갔던 병선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용운아 이건 절호의 찬스다 건물 2층은 봉제공장인 것 같은데 여자
종업원이 족히 100명은 넘는 것 같아. 지금까지 잘 팔아오면서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린 "미남계"를
써가며 열심히 물건을 팔아보자는 말과 함께 건물 계단을 올라갔으나 그 것이 엄청난 실수였던 것이다. 그 계
단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선운그릅의 하루천하의 조짐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
야 ! 이 녀석들 이리 와봐
순간 얼굴을 돌려 계단 밑을 바라보니 거의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구 두 명이 버티고 서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재건대(전쟁고아와 넉마주이...)였던 것이다. 이 놈들이 우리 영역에 들어와서 물건을 팔고있네 ....
그들도 우리랑 똑같은 물건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강조하면 거의 강매를 하고 있었던 것
으로 판단된다.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곳에서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 들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물건 내려놔 이 누무 시키들아 ! 병선은 중간계단에서 물건을 내려놓고 나는 병선과 그 들이 내려다보이는 2
층 계단에서 물건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움직임이 조금만 빨랐더라도 저놈들에게 재수없
게 걸리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물건을 놔두고 도망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젠 모든 것을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재건대 놈들은 우선 병선에게 무차별적으로 린치를 가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 린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퍽 퍽 ! 순간순간 우리의 눈빛은 억울함과 우리가 도데체 왜 이놈들에게
.....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들은 그래도 양심이 있었던지 물건을 판돈만을 강탈하고 나머지 물건을 우리에게 돌려주곤 " 야 시키들아
다음에 또 걸리면 뼈도 못추려 알아..... 어쭈 ... 왜 대답 안해 !..." 이렇게 한마디 말을 남기고 피 같은 우리
의 판매대금을 강탈해 가지고 유유히 사라져갔다. 병선과 나는 서로를 처다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린치
를 당해 벌것케 달아오른 서로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한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도데체가 용돈이 무엇이길래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
우린 그 길로 나머지 물건을 주인에게 가져다주고 힘없이 신촌시장입구로 걸어나왔다 그리곤 서로의 주머니를
털어 연대 앞 굴다리 밑에 있는 막걸리집-그날 막걸리는 유난히도 맛이 좋았다- 으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그리곤 우린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첫째 : 학교에 가서는 창피하니까 절대 이번 일은 발설하지 말자
둘째 : 다시는 동업하지 말자 따라서 선운그릅은 오늘 부로 해체다.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한마디 잊지 않고 던졌던 말은 너는 태권도니 유도니 하는 것 그 많은 운동 중에 배운
것이 하나도 없냐 .....
그 이후 병선과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학교에서 선·후배들을 만나며 태연스럽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얼마 후 동기들이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듣고는 그 이야기를 꺼내며 한심하다는 듯이 우리를
처다 보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나는 그 이야기의 발설자를 밝히고 싶다..... 누가 발설했는지는 나는 정말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 집사람(영자)에게만 그것도 결
혼하기전 ('93년도)에 말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이후 병선과 나는 가끔씩 그때 이야기를 꺼내며 묘한 미소를 짓곤한다. 18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선운그룹의 공동대표 중의 한 명이었던 병선은 기업운영의 한을 풀고자 재건대 보다도 더 무서운 IMF의 터널을 뚤고 (주)두코의 사장으로 변신했으니 그 당시 우리가 생각한 기업운영의 꿈은 이름만 다를뿐 50% 는 이룬 셈이다. 그리고 나는 회사 운영과는 인연이 멀어 멀리 포항에서..... 그리고 물회을 반드시 선배(특히 계연, 현룡형)들에게 진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헌렁이형은 5천만의 연인 영자를 운운하며 가끔씩 무지막지한 메일을 포항으로 내려보내며 물회에 대한 압박을 가해오고 있다. 겨울에는 과메기도 좋다나 .....!
선운그룹의 하루천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 옛날이여......
---------
- [민병선(6)님 답변]
푸하! 너무재미있고 창피한 하루였다.
어렴풋하게만 그당시의 기억만있는데 이글을보니 장면들이 선명하게 나타나누만.
각설하고 그사건의 압권은 용운이의 가공할만한 맷집이었다.어두컴컴한 계단에서 이몸이 린치를당하며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끝났으면하고 갖은 애처로움,또는 너무도 괴롭다는 표정연기를 애써하고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린치를 가하고있던 재건대왈,용운교수를보며"야 X야 너지금 웃고있냐?"하며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나보다 더 심하고/강도높고/가혹하게 린치를 가하고 있었다.이 광경을보며 어찌나 안타깝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어,아뭏튼 아주묘한 웃음과 표정을 참느라 죽는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용운교수의 맷집은 정말로 짱이었다는것을 것을 알려드림니다.(야! 그런데 너 아직도 맷집쌔냐?,푸하하)
'83년 여름방학의 마지막 무렵이었다. 당시 나의 캠퍼스는 율전이었지만 집이 동숭동인터라 자주 명륜
동 동기 및 선·후배들과 만났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날도 아침 일찍(약 10시경으로 기억남) 병선과 명륜동 청
룡상 주변의 벤치에 앉아 쓰디쓴 담배(그 당시는 청자를 주로 피웠는데 이는 선배들의 강요.... ?)를 하나씩 입
에 물고 있었다.
그 당시는 우리는 학생신분이라는 것 외에는 뭐하나 풍족할 것 없는 빈털터리 신세 였고 그나마 학교에서 학
생임을 확인시켜주는 학생증 마져 술집(나는 율전의 초가집 병선은 명륜동의 시골집인 것으로 기억남)잡혀놓
은 상태였다. 요즘은 학생들이 과외를 해서 용돈을 충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에는 "과외 금지조치"가 내려
진 상황이라 학생들의 자금 원은 거의 집에서 보내주는 생활비(일주일만 지나면 다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읽
는 이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람)와 각종 아르바이트로 몇 푼 안되는 용돈을 만져보는 것이 전부였다.
벤치에 앉아있던 우리는 누가 먼저이야기를 꺼냈는지 아르바이트를 해보자는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내친김에
회사이름도 지어보자는 말에 용운의 끝자인 운과 병선의 끝자인 선을 따서 "선운" 또는 "운선"이 좋다는 말싸
움 끝에 결국에는 어감이 좋은 선운으로 회사명을 정하고, 선운그릅의 상품은 보리차와 고무장갑 그리고 수
세미-보리차 1봉지에 1000원 팔면 400원은 우리 것으로 떨어짐- 등으로 정했다. 그리곤 우리의 첫 공략지역을
신촌으로 정하고 버스를 타고 신촌시장을 향하여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신촌시장 입구 근처에 있는 허름한 건물 삼층에 올라가니 사무실 안에는 온통 보리차와 수세미 그리고 고무장
갑 등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고 그 뒤에서 사장인 듯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웃음을 던지며 다가와 말을 건넸
다.
아르바이트 해보려고 ? 예 !
얼마나 가져갈거니 ?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학생증이나 신분증은 있니 ? 아니요 !
그러면 주민등록증 이라도 ....... 여기 있어요....
어찌되었건 우리는 보리차 푸대를 주인으로부터 인계 받고 길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신촌시장의 장터 아
줌마 , 아저씨들에게 보리차하나만 사주세요 보리차가 싫으면 고무장갑도 있어요..... 라고 말을 건네며 가급적
웃는 얼굴로 다가갔다. 장터에 있는 사람들은 학생들이 용돈이라도 벌고자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인지 아
니면 우리가 측은해 보여서인지 5번 시도에 한 번 정도는 물건을 팔 수 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병선과
나는 기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좀더 열심히 팔면 우리 술집 외상값 다 값고도 남아.... 선운그릅 파이팅 !
열심히 물건을 팔았던 관계로 우리는 주머니엔 만원권 지폐를 넣고 다닐 수 있는 쾌거를 이루고 있었다. 이
때 용운아 ! 저 건물에 들어가 보자 내가 들어가 사람들이 많은가 확인하고 나올게 하면서 들어갔던 병선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용운아 이건 절호의 찬스다 건물 2층은 봉제공장인 것 같은데 여자
종업원이 족히 100명은 넘는 것 같아. 지금까지 잘 팔아오면서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린 "미남계"를
써가며 열심히 물건을 팔아보자는 말과 함께 건물 계단을 올라갔으나 그 것이 엄청난 실수였던 것이다. 그 계
단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선운그릅의 하루천하의 조짐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
야 ! 이 녀석들 이리 와봐
순간 얼굴을 돌려 계단 밑을 바라보니 거의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구 두 명이 버티고 서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재건대(전쟁고아와 넉마주이...)였던 것이다. 이 놈들이 우리 영역에 들어와서 물건을 팔고있네 ....
그들도 우리랑 똑같은 물건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강조하면 거의 강매를 하고 있었던 것
으로 판단된다.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곳에서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 들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물건 내려놔 이 누무 시키들아 ! 병선은 중간계단에서 물건을 내려놓고 나는 병선과 그 들이 내려다보이는 2
층 계단에서 물건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움직임이 조금만 빨랐더라도 저놈들에게 재수없
게 걸리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물건을 놔두고 도망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젠 모든 것을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재건대 놈들은 우선 병선에게 무차별적으로 린치를 가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 린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퍽 퍽 ! 순간순간 우리의 눈빛은 억울함과 우리가 도데체 왜 이놈들에게
.....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들은 그래도 양심이 있었던지 물건을 판돈만을 강탈하고 나머지 물건을 우리에게 돌려주곤 " 야 시키들아
다음에 또 걸리면 뼈도 못추려 알아..... 어쭈 ... 왜 대답 안해 !..." 이렇게 한마디 말을 남기고 피 같은 우리
의 판매대금을 강탈해 가지고 유유히 사라져갔다. 병선과 나는 서로를 처다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린치
를 당해 벌것케 달아오른 서로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한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도데체가 용돈이 무엇이길래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
우린 그 길로 나머지 물건을 주인에게 가져다주고 힘없이 신촌시장입구로 걸어나왔다 그리곤 서로의 주머니를
털어 연대 앞 굴다리 밑에 있는 막걸리집-그날 막걸리는 유난히도 맛이 좋았다- 으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그리곤 우린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첫째 : 학교에 가서는 창피하니까 절대 이번 일은 발설하지 말자
둘째 : 다시는 동업하지 말자 따라서 선운그릅은 오늘 부로 해체다.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한마디 잊지 않고 던졌던 말은 너는 태권도니 유도니 하는 것 그 많은 운동 중에 배운
것이 하나도 없냐 .....
그 이후 병선과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학교에서 선·후배들을 만나며 태연스럽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얼마 후 동기들이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듣고는 그 이야기를 꺼내며 한심하다는 듯이 우리를
처다 보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나는 그 이야기의 발설자를 밝히고 싶다..... 누가 발설했는지는 나는 정말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 집사람(영자)에게만 그것도 결
혼하기전 ('93년도)에 말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이후 병선과 나는 가끔씩 그때 이야기를 꺼내며 묘한 미소를 짓곤한다. 18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선운그룹의 공동대표 중의 한 명이었던 병선은 기업운영의 한을 풀고자 재건대 보다도 더 무서운 IMF의 터널을 뚤고 (주)두코의 사장으로 변신했으니 그 당시 우리가 생각한 기업운영의 꿈은 이름만 다를뿐 50% 는 이룬 셈이다. 그리고 나는 회사 운영과는 인연이 멀어 멀리 포항에서..... 그리고 물회을 반드시 선배(특히 계연, 현룡형)들에게 진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헌렁이형은 5천만의 연인 영자를 운운하며 가끔씩 무지막지한 메일을 포항으로 내려보내며 물회에 대한 압박을 가해오고 있다. 겨울에는 과메기도 좋다나 .....!
선운그룹의 하루천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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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선(6)님 답변]
푸하! 너무재미있고 창피한 하루였다.
어렴풋하게만 그당시의 기억만있는데 이글을보니 장면들이 선명하게 나타나누만.
각설하고 그사건의 압권은 용운이의 가공할만한 맷집이었다.어두컴컴한 계단에서 이몸이 린치를당하며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끝났으면하고 갖은 애처로움,또는 너무도 괴롭다는 표정연기를 애써하고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린치를 가하고있던 재건대왈,용운교수를보며"야 X야 너지금 웃고있냐?"하며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나보다 더 심하고/강도높고/가혹하게 린치를 가하고 있었다.이 광경을보며 어찌나 안타깝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어,아뭏튼 아주묘한 웃음과 표정을 참느라 죽는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용운교수의 맷집은 정말로 짱이었다는것을 것을 알려드림니다.(야! 그런데 너 아직도 맷집쌔냐?,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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